article · 2026-06-25
꽃을 피우기 전에 가꿔야 하는 것이 있다: 성과주의 사회에서 다시 보는 성장의 기반
성과와 속도만 보면 놓치는 것이 있다. 꽃을 피우기 전에 흙부터 가꿔야 하듯, AI가 만든 결과를 거두기 전에 그것을 설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 토대를 길러야 한다. 한 교실의 AI 리터러시 격차에서 출발해, 성과주의 사회가 건너뛴 '성장의 기반'을 다시 본다.
요약
교육이 많이 변했다. 교육격차의 무대가 학교 사이에서 학급 사이로, 이제는 한 교실 안으로 좁혀졌다. 같은 반,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도 AI 리터러시가 학생을 가른다. 조직의 AX(AI 전환) 이해도 격차도 똑같다. 회사와 회사 사이가 아니라 한 팀 안에서 더 크게 벌어진다.
한 겹 아래로 내려가면 이유가 보인다. AI 리터러시는 허공에 뜬 새 능력이 아니라 디지털 리터러시 위에 선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도메인 지식이라는 암묵지가 있다. AI가 내놓은 결과가 맞는지 틀린지 가르는 눈은 결국 그 일을 아는 데서 나온다.
암묵지를 끌어내는 일은 사실 낯설지 않다. AI 모델을 만들 때 우리는 전문가를 인터뷰해 그들의 암묵지를 규칙과 데이터로 옮긴다. 주니어가 도메인을 익히는 것도, 조직이 AI 위에서 돌아가게 만드는 것도 결국 같은 작업이다. 암묵지를 설명 가능한 형태로 끌어내는 일.
그래서 AI-Native System은 결국 조직 단위의 XAI, 설명 가능한 AI의 연장선이다. 개별 모델의 설명 가능성을 조직 운영으로 넓힌 것. 그 품질의 상한은 모델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산출물을 어디까지 설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가에 묶인다.
우리는 흔히 AX를 성과와 속도로 잰다. 그러나 꽃을 피우기 전에 흙부터 가꿔야 하듯, AI가 만든 결과를 거두기 전에 그것을 설명하고 검증할 수 있는 토대부터 길러야 한다. 성과주의가 간과해 온 것이 바로 그 토대, 곧 설명 가능한 시스템이다. 이 글은 한 교실의 작은 격차에서 출발해 거기까지 따라간다.
1. 같은 흙에서도 다르게 자란다: 격차가 한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교육격차의 무대는 시대마다 안쪽으로 좁혀져 왔다. 처음엔 학교 사이의 문제였다. 어느 동네에 살고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가 성취를 갈랐다. 그다음엔 같은 학교 안에서도 학급이 나뉘었다. 어떤 반에 배정되고 어떤 교사를 만나는지가 또 다른 선을 그었다.
그리고 지금은 같은 교실 안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한 줄 앞뒤로 앉은 두 학생이 전혀 다른 세계를 산다. 한 학생은 생성형 AI로 영어 에세이를 다듬고 모르는 개념을 되물어 가며 공부하는데, 옆 학생은 그 도구에 무엇을 물어야 할지조차 모른다. 같은 학교, 같은 반,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도 AI 리터러시가 둘을 가른다.
우리는 정반대를 기대했다. 기술이 발전하면 정보 격차가 줄어들 거라고. 좋은 학군이나 비싼 과외가 쥐고 있던 정보를 이제 누구나 같은 검색창, 같은 AI 도구로 접근할 수 있으니 평준화될 거라고. 그러나 실상은 반대였다. 접근권은 평평해졌지만 활용 준비도는 평평해지지 않았다. 격차는 사라진 게 아니라 더 안쪽으로, 더 미세한 단위로 옮겨갔다.
연구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를 분석한 연구는 학교 간 평균 차이보다 한 학교 안의 성취도 편차가 학생의 수업 참여와 정의적 성취를 더 직접적으로 떨어뜨린다고 보고했다 8. KERIS의 디지털 리터러시 측정 연구는 같은 학년 안에서도 생성형 AI를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쓰는 역량이 갈린다는 점을 핵심 측정 과제로 삼는다 10. 격차의 단위가 '학교'에서 '학생'으로 내려온 셈이다.
조직도 정확히 같은 자리에 있다. AX를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척도는 회사 단위 평균이지만, 정작 일이 막히는 자리는 회사 사이가 아니라 한 팀 안이다. OpenAI가 약 100개 기업, 9,000명을 분석한 결과, 같은 도구를 쓰는데도 상위 사용자가 중위 사용자보다 메시지를 6배, 코딩에서는 17배 더 보냈다 1. 접근권을 줬다고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교실에서든 회사에서든, 격차는 평균이 아니라 한 교실·한 팀 안의 분산으로 나타난다.
2. 한 겹 파보면: AI 리터러시는 디지털 리터러시 위에 선다
격차의 정체는 한 겹 아래에 있다. AI 리터러시는 허공에서 솟은 새 능력이 아니다. 교육 연구에서 AI 학습 준비도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한 갈래로 다뤄진다. 즉 AI를 배울 기회의 격차는 독립 현상이 아니라 더 넓은 디지털 리터러시 격차의 특수 사례다. AI만 따로 떼어 보면 기기, 접속, 정보 판단, 자기조절 같은 선행 조건을 놓치기 쉽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프롬프트를 잘 쓴다, 못 쓴다"로 좁혀 보면 본질을 놓친다. AX를 받아들이는 능력은 평소 문서를 구조화하고, 출력을 의심하고, 도구를 조합하고, 자기 작업을 점검하던 디지털 작업 역량 위에 얹힌다. AX 격차는 새로 생긴 격차가 아니라, 원래 있던 디지털 업무 역량 격차가 AI라는 표면에서 더 선명해진 것이다. 그래서 프롬프트 교육 한 번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그 디지털 작업 역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풀어보면, AI를 잘 쓴다는 게 왜 표면인지 분명해진다. 적어도 세 가지가 밑에 깔려 있어야 한다.
- 데이터의 신뢰도와 정합성을 먼저 따진다. 숫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출처가 믿을 만한지, 다른 근거와 앞뒤가 맞는지 확인하는 일이 기본값이어야 한다. 하나의 값을 그대로 믿는 대신 서로 다른 관점의 값을 교차 검증하고, 추정은 '대략 얼마'가 아니라 '이 범위 안에서 이 정도 신뢰'처럼 오차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편향이 어디서 새어 드는지 안다. 의미를 고르는 층위에서 생긴 작은 프레이밍 편향은 그대로 의사결정 편향으로 전파된다. AI가 고른 단어와 틀이 곧 다음 판단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14.
- 무엇을 만들지, 어떻게 검증·개선할지를 설계한다. 도구를 부리는 기술 자체는 얇은 한 겹이다. 진짜 역량은 그 도구로 무엇을 만들지 정의하고, 결과를 어떻게 검증하고 개선할지의 루프를 잡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셋을 한 문장이 떠받친다. 결과물의 품질은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의 인식론적 상한을 넘지 못한다 15. 검증하는 사람이 모르는 오류는 걸러지지 않고, 그가 던지지 못하는 질문은 도구도 대신 던져주지 않는다.
이 한계 때문에 AI·디지털 도구는 격차를 자동으로 줄이는 장치가 아니다. 오히려 준비도를 전제로 요구한다. 교육 연구도 AI·디지털 교육자료의 효과는 학생의 AI 학습 준비도가 있어야 나타난다고 본다 11. 같은 코파일럿, 같은 사내 LLM을 전사에 똑같이 깔아도 결과가 균등하지 않은 이유다. 준비도 차이가 큰 조직에 도구를 균일하게 뿌리면, 도구는 격차를 메우기 전에 먼저 격차를 드러낸다.
3. 더 깊은 뿌리, 도메인 암묵지: 익숙한 풍경 하나
디지털 리터러시를 더 파 내려가면 맨 밑에 도메인 지식이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 알아보는 눈은 결국 그 일을 아는 데서 나온다. 그리고 그 도메인 지식의 핵심은 책에 적히지 않은 암묵지다. 규칙, 맥락, 예외를 다루는 판단.
이 지점에서 지금 직장인의 준비도가 한 겹 늘었다는 게 드러난다. 예전의 직무 준비도는 사실상 도메인 지식 하나였지만, 지금은 거기에 AI 리터러시가 얹혔다. 시니어는 이미 도메인이라는 토대가 있어 그 위에 한 겹만 얹으면 되지만, 토대를 쌓는 중인 신입·주니어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쫓아야 한다. AI에 기대 빨리 결과를 내면 도메인이 자라지 않고, 도메인을 차근차근 쌓으려 하면 AI로 무장한 동료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건 의지가 아니라 국면의 문제다. 스탠퍼드 Digital Economy Lab은 AI 노출이 높은 직군에서 22~25세 고용이 약 16%, 같은 또래 개발자는 정점 대비 약 20% 줄었다고 보고했다 7. 신입의 단순 과업이 도메인 암묵지를 흡수하는 '유급 교육'이었는데, AI가 그 과업을 대신하며 학습 곡선 자체가 자동화됐기 때문이다. 방치하면 시니어를 길러낼 파이프라인이 끊긴다.
그런데 '암묵지를 끌어낸다'는 이 일은, 사실 많이 본 풍경이다. AI 모델을 만들 때 우리는 전문가를 인터뷰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만 있던 판단 기준과 예외 처리, 곧 암묵지를 캐물어 규칙과 데이터, 라벨로 옮긴다. 과거의 전문가 시스템도, 요즘의 도메인 특화 모델도 그 과정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주니어가 선배에게서 일을 배우는 것과, 모델이 전문가에게서 지식을 얻는 것은 같은 작업의 두 얼굴이다. 암묵지를 끄집어내 설명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일.
그래서 주니어 문제의 해법도, AI를 조직에 들이는 문제의 해법도 한 곳을 가리킨다. 암묵지가 사람과 도구 사이를 오가도록, 그 과정을 드러내고 남기는 구조를 짜는 것.
4. 무엇을 가꿀 것인가: AI-Native System은 조직 단위의 XAI다
여기까지 오면 글의 진짜 목적지가 보인다.
AI가 만든 코드와 산출물이 사람 눈으로는 더 이상 평가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면, 시스템은 빠르게 블랙박스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AI-Native의 품질은 결국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설명 가능한가', 곧 설명 가능성(XAI)의 문제로 수렴한다. 품질의 상한은 모델이 아니라, 그 산출물을 인간이 어디까지 관측하고 범주로 분별할 수 있는가, 곧 인간의 관측 해상도에 묶인다 16.
AI-Native System이란 조직이 AI 위에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조직이 건강하려면 AI가 내린 결정과 만든 결과가 사람에게 설명 가능해야 한다. 다시 말해 AI-Native System은 개별 모델의 설명 가능성을 조직 운영의 차원으로 넓힌 것, 곧 조직 단위의 XAI다. 한 교실의 AI 리터러시 격차가 끝내 위험해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검증할 눈이 자라지 못한 채 도구만 빨라지면, 격차는 '누가 더 빨리 만드나'를 넘어 '누가 그 결과를 설명하고 책임질 수 있나'로 벌어진다.
그러니 조직이 할 일은 분명하다. 도구를 균일하게 뿌리는 게 아니라, 조직이 자기 AI를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교육에서 교사의 수업 지원이 교실 내 학습 비대칭을 완화하듯, 조직에는 스캐폴딩이 필요하다. 네 가지로 압축된다.
- 팀 안의 분산을 측정한다. 도입률(평균) 말고, 누가 어디까지 쓰는지의 분포를 본다.
- 준비도에 맞춰 진입점을 다르게 준다. 잘 쓰는 사람에겐 자유도를, 낮은 준비도엔 검증된 워크플로와 템플릿이라는 좁은 길을 준다.
- 동료 매개를 제도화한다. 잘 쓰는 사람의 작업을 공유 자산(프롬프트, 리뷰 패턴)으로 만들어 옆자리로 흐르게 한다.
- 검증을 기본기로 가르친다. AI 사용을 도메인 학습과 분리하지 말고, 무엇을 왜 물었고 무엇을 남기고 버렸는지 기록해 사고 과정을 드러낸다. 그 자체가 산출물을 설명 가능하게 붙드는 일, 곧 암묵지를 설명 가능한 형태로 끌어내는 일이다.
AX 성숙도가 높은 해외 조직들이 이미 그 방향이다. Microsoft는 동료 리더 그룹(Copilot Champs)과 3주 코호트로 전 직원을 끌어올렸고 5, AstraZeneca는 Bronze·Silver·Gold 티어 인증으로 단계화했으며 3, JPMorgan은 30만 인력을 직군별로 쪼개 가르쳤다 4. Moderna는 여러 도구를 평가한 뒤 하나에 집중해 두 달 만에 사내 맞춤 도우미 750개를 만들어 냈고 2, Accenture와 IBM은 견습과 무료·다국어 교육으로 끊긴 입문 경로를 다시 이었다 6. 공통점은 하나다. 균일 배포를 피하고, 준비도에 맞춰 진입점을 나누고, 사람 매개를 제도로 붙였다는 것.
5. 흙을 탓하기 전에: 사회경제적 배경이라는 변수
마지막으로 솔직한 한계 하나. 교육 연구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원격수업 환경 격차를 심화한다는 점은 비교적 일관되게 보여주지만, 사회경제적 배경이 곧바로 AI 교육격차를 낳는다는 직접 관계까지는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그건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후보 가설로 남겨졌다 9.
조직에 옮길 때도 같은 신중함이 필요하다. "직급이 높으면, 나이가 많으면, 비개발 직군이면 AX 이해도가 낮다"는 단정은 편하지만 위험하다. 배경으로 사람을 미리 분류하는 순간 스캐폴딩은 낙인이 된다. 배경은 가설로 두고, 지원은 준비도라는 관찰 가능한 변수에 맞추는 편이 안전하다.
결론
격차의 무대는 줄곧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 사이에서 학급 사이로, 한 교실 안으로. 그 안에서 AI 리터러시는 디지털 리터러시 위에 서고, 그 바닥에는 도메인 지식이라는 암묵지가 있다. 그 암묵지를 끌어내 설명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일은, 모델을 만들 때 전문가를 인터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AI-Native System의 성패는 어떤 모델을 깔았는가가 아니라, 그 조직이 자기 AI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에서 갈린다. AI가 사람의 관측 해상도를 넘어서는 순간 품질은 검증 불가능한 블랙박스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 선은 같은 도구를 쥔 두 사람 사이에, 그리고 그 도구를 설명할 수 있는 조직과 없는 조직 사이에 그어진다. 그 선을 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구 곁에 무엇을 붙이느냐다.
꽃은 거두는 것이지 심자마자 피지 않는다. 성과를 재촉하기 전에 가꿔야 할 것은, 그 결과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 토대, 곧 성장의 기반이다. 교실에서 조직으로, 다시 사회로, 그 기반을 먼저 길러야 그 위에서 성과도 오래간다. 성과주의 사회가 자꾸 건너뛰는 것이 바로 이 순서다.
Sources
1차 출처(원 학술지·DOI·발행기관) 기준으로 정리한다. 인용색인 포털(KCI) 링크는 원 학술지·DOI로 대체했다.
- OpenAI (2025). The State of Enterprise AI. link · PDF
- OpenAI. Moderna (customer case, ChatGPT Enterprise·사내 GPT). link · HBS case
- AstraZeneca (2025). Upskilling our workforce to thrive in the age of AI. link
- AI Magazine. How JPMorgan is Embedding AI into Employee Performance. link
- Microsoft Cloud Blog (2025). Accelerate employee AI skilling: Insights from Microsoft. link · Camp Copilot
- The Apprenticeship Severance: How AI Is Breaking the Expertise Pipeline. link
- Stanford Digital Economy Lab (2025), early-career employment 관련 보도. link · SSIR
- 남인혜·이안나 (2022). 학교 내 학업성취도 편차가 학생의 수업 참여 및 정의적 성취에 미치는 영향. 교육행정학연구 40권, 한국교육행정학회. link
- 박미희 (2020). 코로나19 시대의 교육격차 실태와 교육의 과제: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교육사회학연구 30(4), 113-145, 한국교육사회학회. link
-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2025). 2025년 학생 디지털 리터러시 수준측정 연구. link
-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학습자 특성에 따른 AI·디지털 교육자료 활용 수업 교육효과 질적 연구. link
- 한국교육개발원(KEDI). 교육격차 실태 종합 분석. link
- OECD (2023). PISA 2022 Results (Volume I and II), Country Notes: Korea. link
- WMJOON. Semantic Bias Propagates to Decision Bias (의미 층위의 편향이 의사결정 편향으로 전파되는 경로), Notion. link
- WMJOON. AI는 무엇으로 자신을 재는가 - Oracle, 판정 기준의 구조와 한계, Notion. link
- WMJOON. Semantic Category Benchmark - 인간의 관측 해상도 관점에서의 의미적 범주 측정 방안, Notion.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