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2026-06-04
모델은 바뀌어도, 일은 바뀌지 않는다
도구별로 나누던 작업을 작업실 단위로 옮기자, 에이전트의 기억이 엉키지 않기 시작했다
요약
처음 AI한테 일을 나눠 맡길 때, 나는 **"어떤 AI를 쓰느냐"**를 기준으로 칸을 나눴다. 이 도구 전용 칸, 저 도구 전용 칸. 도구가 하나 늘 때마다 칸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도구는 자꾸 바뀐다. 새 AI가 나오고, 쓰던 걸 갈아치우고, 둘을 같이 쓰기도 한다. 그때마다 칸 구조가 흔들렸다. 기억이 엉키고, 어느 칸에 뭘 적었는지 헷갈렸다.
그래서 어느 날, 기준을 통째로 바꿨다. **"어떤 AI냐"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 곳이냐"**로. 지식을 쌓는 곳, 콘텐츠를 만드는 곳. 나는 이걸 작업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도구가 바뀌어도 "작업실"은 그대로 있으니까, 칸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 글은 그 작은 기준 변경에 대한 이야기다. 별거 아닌 정리 같았는데, 알고 보니 "여러 AI의 기억을 어떻게 안 엉키게 할까"라는 꽤 큰 문제의 답에 가까웠다.
작업실, 그리고 전체를 안내하는 안내소
내가 만든 구조는 이렇게 생겼다.
각각의 작업실이 있다. 하나는 지식을 쌓는 작업실, 하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실이다. 그리고 작업실마다 세 가지를 갖춰뒀다.
- 구조도: 이 작업실에 뭐가 어디 있는지 보여주는 평면도.
- 사용설명서: 여기서 일을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적은 매뉴얼.
- 작업일지: 여기서 무슨 일을, 왜 그렇게 했는지 남긴 기록.
작업실은 각자 알아서 굴러간다. 자기 구조도, 자기 매뉴얼, 자기 일지를 들고 자기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작업실들 바깥에 전체를 안내하는 안내소가 하나 있다. 흔히 '우산(엄브렐러)'이라고 부르는 자리다. 안내소의 특이한 점은, 정작 자기 안에는 작업물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큰 현황판 하나가 걸려 있다. "지식 작업실 → 6월 3일 상태", "콘텐츠 작업실 → 6월 4일 상태" 같은 식으로, 각 작업실이 지금 어느 시점 상태인지만 적혀 있다.
그림으로 보면 이렇다.
agent-vaults/ # 안내소: 전체 현황을 한눈에 안내하는 자리
├─ .gitmodules # 현황판: 어느 작업실을 어느 상태로 묶었는지
├─ agent-context/ # 안내소 자체 기록 (전체 조율용)
│ ├─ index
│ ├─ workflow
│ └─ work-memory
│
├─ my-knowledge-base/ # 작업실 1: 지식을 쌓는 곳
│ └─ agent-context/
│ ├─ index # 구조도 (뭐가 어디 있는지)
│ ├─ workflow # 사용설명서 (어떤 순서로 일하는지)
│ └─ work-memory # 작업일지 (무슨 일을, 왜 했는지)
│
└─ content-broadcast-hub/ # 작업실 2: 콘텐츠를 만드는 곳
└─ agent-context/
├─ index # 구조도
├─ workflow # 사용설명서
└─ work-memory # 작업일지
작업실마다 똑같이 구조도·사용설명서·작업일지를 갖췄고, 안내소는 그 바깥에서 "어느 작업실이 어느 상태인지"만 들고 있다.
여기서 의외로 쓸모 있는 성질이 나온다.
안내소 현황판은, 모든 작업실이 "그 순간 정확히 어떤 상태였는가"를 통째로 박제한다.
그러니까 현황판 한 장은 일종의 단체 사진이다. "이 순간, 모든 작업실이 각각 어디까지 와 있었는지"를 한 장에 담아둔 것이다. 나중에 그 현황판으로 돌아가면, 전체가 그때 그 모습으로 정확히 되살아난다. 빠진 것도, 헷갈릴 것도 없다.
그리고, 연장을 만드는 작업실
작업실이 지식이나 콘텐츠처럼 "결과물"만 만드는 건 아니다. 그 작업실들이 쓸 연장 자체를 만드는 작업실도 따로 있다. 내 경우엔 그게 agent-toolkit-forge다. 이름 그대로 도구를 벼리는 공방이다.
앞에서 작업실마다 "사용설명서(일하는 순서)"가 있다고 했다. 그 사용설명서와, 여러 AI를 한꺼번에 부리는 방식, 반복 작업을 묶어둔 스킬 같은 연장들이 바로 이 공방에서 나온다. 지식 작업실도 콘텐츠 작업실도, 결국 이 공방에서 벼린 연장을 가져다 쓴다.
재밌는 건, 이 공방도 똑같은 방식으로 정리돼 있다는 점이다.
agent-toolkit-forge/ # 공방: 다른 작업실이 쓸 연장을 만드는 곳
├─ multi-swarm-orchestrator/ # 연장 하나 — 여러 AI를 동시에 부리는 방식
│ └─ agent-context/ # 이 연장도 자기 구조도·매뉴얼·일지를 갖춤
│ ├─ index # 구조도
│ ├─ workflow # 사용설명서
│ └─ work-memory # 작업일지
│
├─ markdown-scaffolding/ # 연장 하나
│ └─ agent-context/ # 마찬가지로 자기 agent-context/
│ └─ ...
│
├─ prompt-factorization/ # 연장 하나
│ └─ agent-context/
│ └─ ...
└─ ... # 연장별로 한 칸씩
안에는 수십 개의 연장이 각각 한 칸씩 들어 있다. 그리고 여기가 핵심인데, 연장 칸 하나하나가 또 작업실과 똑같이 생겼다. 칸마다 자기 구조도(index)·사용설명서(workflow)·작업일지(work-memory)를 담은 agent-context/를 자기 안에 갖고 있다. 큰 작업실에 적용한 그 정리법이, 공방 안의 작은 연장 칸에도 그대로 한 번 더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중 잘 벼려져 남들도 쓸 만한 것은 공개 진열대(공개 저장소)로 내보낸다. 연장 하나를 만들 때도 순서가 정해져 있다. 설계하고, 만들고, 시험하고, 출시한다.
그러니까 같은 정리법이 한 겹 더 안에서 반복되는 셈이다. 큰 틀에서 작업실을 나누는 방식이, 작업실 안에서 연장을 나누는 데도, 그 연장 하나하나의 속에도 똑같이 쓰인다. 한 번 익혀두면 어느 층위에서나 통하는 정리법인 것이다.
진짜 핵심은 "누가 무엇을 책임지나"
내가 이 구조에서 제일 오래 들여다본 건 편리함이 아니었다. 책임이 깔끔하게 나뉜다는 점이었다.
안내소는 작업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 작업실이 새 상태가 됐고, 나는 그 상태를 현황판에 올렸다"까지만 안다. 그 안에서 어떤 자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전적으로 그 작업실이 알아서 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 안내소(바깥): 어느 작업실이 어느 상태인지, 전체 그림만 책임진다.
- 작업실(안): 자기 안의 작업과 그 이력을 책임진다.
바깥과 안이 섞이지 않는다. 바깥은 "전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만, 안은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만 본다. 나는 이 깔끔한 선 긋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정리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AI 단위'가 아니라 '작업실 단위'여야 했나
여러 AI한테 일을 나눠 맡겨본 사람은 안다. 제일 먼저 꼬이는 건 똑똑함이 아니라 기억이다.
여러 AI가 같은 공책에 동시에 메모를 적으면, 누가 언제 뭘 적었는지 금세 엉킨다. 그렇다고 한 곳에 다 합치면, 한 AI의 사소한 낙서가 다른 AI의 중요한 메모를 덮어버린다. 반대로 완전히 따로 떼어두면, 전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무도 모른다.
핵심은 무엇을 기준으로 칸을 나누느냐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처음에 틀렸다.
처음엔 "AI별로" 칸을 나눴다. 이 도구의 기억, 저 도구의 기억. 그런데 도구는 자꾸 바뀐다. 도구를 갈아치우면 그 칸의 기억이 통째로 붕 떴다. 칸의 기준이 흔들리니 기억도 같이 흔들렸다.
그래서 칸의 기준을 "작업실별로" 바꿨다. 지식을 쌓는 작업실,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실. 이건 어떤 AI를 쓰든 변하지 않는다. 오늘은 이 도구로, 내일은 저 도구로 같은 작업실에서 일해도, 작업실은 그대로다. AI는 바뀌어도 '하는 일'은 안 바뀌니까. 안정적인 경계는 도구가 아니라 일에 있었다.
그러자 작업실과 안내소 구조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각 작업실 = 각 작업의 기억. 자기 구조도, 매뉴얼, 일지를 들고 자기 안을 책임진다. 어떤 AI가 들어와 일하든 상관없이.
- 안내소 = 전체를 조율하는 자리. "지금 어느 작업실이 어느 상태인지"만 현황판에 올린다. 시시콜콜한 내용은 안내소까지 가져오지 않는다.
- 현황판 = 단체 사진. 전체가 이 순간 어떤 상태였는지 한 장에 박제한다.
그래서 규칙은 이렇게 굳었다. 위에는 "어느 작업실이 어느 상태인지"만, 안에서 한 일은 그 작업실 안에만. 새로 발명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 작업장을 관리해 온 오래된 방식을, AI의 기억에 그대로 빌려온 것뿐이다.
작업실을 묶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여러 작업실을 묶는 방법이 이거 하나는 아니다. 각 방법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무언가를 얻는다. 쉽게 풀면 이렇다.
| 방식 | 쉽게 말하면 | 좋은 점 | 아쉬운 점 |
|---|---|---|---|
| 현황판 방식(내가 고른 것) | 안내소엔 현황판만, 작업물은 각 작업실에 | 가볍고, 어느 상태인지 또렷, 책임이 분리됨 | 손이 좀 더 감(아래에서 설명) |
| 통째 복사 | 작업실 짐을 안내소 안에 그대로 복제해 쌓음 | 작업실이 사라져도 됨 | 안내소가 무거워지고 경계가 흐려짐 |
| 한 작업실에 다 넣기 | 칸막이 없이 모든 일을 한 방에서 | 제일 단순함 | 죄다 얽혀서 따로 떼기 어려움 |
| 관제 명단으로 관리 | 별도 명단으로 여러 작업실을 한 번에 | 작업실이 아주 많을 때 유리 | 명단 자체를 또 관리해야 함 |
내가 현황판 방식을 고른 이유는 단 하나, 경계가 가장 또렷하기 때문이다. 통째 복사는 편하지만 원본과 사본이 섞여서 "이게 따로 굴러가는 작업실이었지"라는 감각이 사라진다. 한 방에 다 넣기는 제일 쉽지만, 내가 원한 건 정반대인 "층층이 나눠진 책임"이었다.
재밌는 건, 이 현황판 방식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조차 한 가지는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미 따로 굴러가는 작업실을, 특정 상태로 가져다 쓸 때는 이 방식이 제일 깔끔하다"고. 내 경우가 딱 그랬다. 지식 작업과 콘텐츠 작업은 원래 따로 움직이는 일이었으니까.
솔직히, 공짜는 아니다
이 방식을 좋게만 말하면 거짓말이다. 손이 더 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내가 실제로 부딪힌 것들.
- 알아서 최신으로 안 바뀐다. 작업실 상태를 한꺼번에 받아도, 각 작업실 속 내용은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이제 최신으로 맞춰" 하고 한 번 더 손을 대줘야 한다.
- 헷갈리면 되돌려버린다. 내 손의 작업실이 옛날 상태인 줄 모르고 그대로 현황판에 올리면, 다른 데서 올려둔 최신 상태를 조용히 옛것으로 되돌릴 수 있다.
- 두 번 저장해야 끝난다. 작업실 안에서 일을 마쳤으면, 안내소 현황판도 "새 상태"로 갱신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하면, 다른 사람은 어긋난 현황판을 들고 헤맨다.
마지막 항목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얼마 전 지식 작업실에 글을 하나 저장했는데, 그건 작업실 안까지만 들어간 상태다. 안내소 현황판은 아직 옛 상태를 가리킨다. "최종 합치기"를 일부러 멈춰둔 것이다. 경계가 또렷하다는 건, 언제 합칠지도 내가 직접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편함과 통제는 결국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아직 못 푼 것: 다른 작업실을 가리키는 메모
그리고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못 푼 문제가 하나 남았다.
내 지식 작업실의 노트들은 서로 연결돼 있다. 한 노트에서 "이건 저 노트 참고"라고 다른 노트를 가리키는 식이다. 그런데 그 참조가 작업실 경계를 넘어, 다른 작업실의 자료를 가리키는 순간 질문이 생긴다. 한 작업실의 메모가 다른 작업실의 내용을 가리키면, 그 연결이 진짜 살아 있다고 누가 보장하나?
현황판 방식은 "어느 작업실이 어느 상태인가"까지는 완벽하게 또렷하다. 하지만 "이 메모가 가리키는 내용이 그 상태에 실제로 있는가"까지는 보장하지 못한다. 안내소는 상태를 챙길 뿐, 작업실 사이의 의미 연결까지 챙기진 않는다.
이건 AI 기억에서도 똑같이 반복될 문제다. 한 작업실의 기억이 다른 작업실의 기억을 내용으로 참조할 때, 칸막이는 둘이 동시에 적다가 부딪히는 사고는 막아준다. 하지만 "참조한 그 내용이 말이 되는가"까지 막아주진 않는다. 칸막이가 푸는 건 충돌이지 의미가 아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다. "AI별로 나누지 말고 작업실별로 나눠라"는 기준은 기억이 흔들리지 않게 해줬다. 거기까지는 확실하다. 다만 그 기준은 칸을 나누는 선까지만 그어줄 뿐, 칸과 칸 사이의 의미가 이어지는지는 아직 내 몫으로 남아 있다.
기준 하나를 "누가 하느냐"에서 "어디서 하느냐"로 바꿨을 뿐인데, AI의 기억 구조를 들여다보게 됐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 질문 하나를 얻었다. 나쁘지 않은 거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