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 note · 2026-05-08
명세라는 인터페이스 — Agentic Workflow 시대의 인수인계 불가 문제
조직은 오랫동안 사람을 역할로 환원해왔다. 서비스기획자, 데이터 분석가, 프론트엔드 개발자. 역할이 명확할수록 대체자도 명확하다. A가 빠지면 같은 역할을 가진 B가 온다. 인수인계는 그 역할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이 전제를 흔든다. 나는 서비스기획을 하고, 자연어 분석을 하고, P
명세라는 인터페이스
Agentic Workflow 시대의 인수인계 불가 문제
들어가며
조직은 오랫동안 사람을 역할로 환원해왔다. 서비스기획자, 데이터 분석가, 프론트엔드 개발자. 역할이 명확할수록 대체자도 명확하다. A가 빠지면 같은 역할을 가진 B가 온다. 인수인계는 그 역할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이 전제를 흔든다.
나는 서비스기획을 하고, 자연어 분석을 하고, PoC를 혼자 끝낸다. 각 파트를 전문가가 나눠서 의견을 조율하는 시간에 이미 완료되어 있다. 효율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그런데 나의 대체자는 없다. 내가 빠지면 세 명의 전문가가 필요하고, 그들에게 일을 나눠주려면 "명세"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설계해야 한다. 그 명세를 만들 수 있는 사람도, 나다.
이 역설 — 인수인계를 위한 명세를 만드는 데 대체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이 필요하다 — 이 Agentic Workflow가 조직에 만들어내고 있는 구조적 문제의 핵심이다.
이 글은 그 구조를 순서대로 따라간다. 먼저 1인 케파 증가 현상이 실재하는지 데이터로 확인하고, 그 현상이 왜 인수인계 불가 문제로 이어지는지를 살핀다. 그다음 역할 경계 자체가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해체가 조직 방향을 개인이 결정하는 구조로 어떻게 수렴하는지를 본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흐름이 만들어내는 "명세"라는 새로운 병목을 이야기한다.
1. Superworker는 실재하는가
2025년 1월, HR 분석가 Josh Bersin은 The Rise of the Superworker를 발표했다. AI로 증폭된 1인이 다역할을 처리하는 현상. "Dynamic Organization"은 동종 조직 대비 6배의 성과를 낸다는 주장이 함께 붙었다. 많은 곳에서 이 수치가 개인 단위의 생산성 배수로 인용됐다.
원문은 다르다. 이 수치는 개별 Superworker가 아니라 "변화 준비도 높은 조직"과 그렇지 않은 조직 간의 비교다. 탈맥락화된 인용이 먼저 유통됐다.
더 엄밀한 데이터는 냉정하다. METR이 2025년 7월 발표한 무작위 대조실험에서, 숙련 개발자들은 AI를 사용했을 때 과제 완료 시간이 오히려 19% 증가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연구에서 개발자 스스로는 "20% 빨라졌다"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도구에 대한 주관적 체감과 객관적 성과 사이의 역전이다.
DX의 400개사 종단 연구(2024.11–2026.02)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킨다. AI 사용이 65% 증가하는 동안 PR 처리량은 9.97% 늘었다. Fortune과 NBER이 임원 6,000명을 3년간 추적한 결과, 약 90%는 AI가 고용이나 생산성에 미친 영향을 0으로 보고했다.
그렇다면 Superworker 현상은 과장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훨씬 좁은 범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Bersin 자신의 후속 보고서(Eightfold AI 공동, 2025.06)에 따르면, 선도 조직에서도 실질적 Superworker는 전체 직원의 **2–3%**에 불과하다. Fastly의 2025년 설문(개발자 791명)은 이 구조를 구체화한다. 경험 10년 이상의 시니어가 AI 생성 코드를 활용하는 비율은 32%인 반면, 주니어는 13%에 그쳤다. 레버리지는 이미 잘하는 사람에게 더 집중된다.
Klarna의 사례는 이 현상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2024년 AI 어시스턴트 하나가 700명 상당의 고객 서비스 업무를 처리했고, 평균 해결 시간은 11분에서 2분 이하로 줄었다. 그런데 2025년 중반, 인간을 재고용하기 시작했다. 극적 증폭의 증거이면서 동시에 한계의 증거다.
Superworker는 실재한다. 그러나 2–3%의 극소수다. 문제는 그 희소성 자체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이 취하는 형태다.
2. 왜 인수인계가 불가능해지는가
Superworker는 숨는다.
Microsoft와 LinkedIn이 2024년 31개국 3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Work Trend Index에 따르면, AI를 쓰는 지식 근로자의 78%가 BYOAI다 — Bring Your Own AI, 즉 회사의 공식 도입 이전에 개인이 먼저 AI를 들여와 쓰고 있다. 중소기업은 80%에 달한다.
더 날카로운 수치는 그다음이다. 이들 중 52%는 중요 업무에 AI를 쓴다는 사실을 밝히기를 꺼린다. 53%는 AI 사용이 드러나면 대체 가능해 보일까봐 공유하지 않는다. 의도적 은폐다.
인수인계 불가 문제는 기술적 장벽 이전에 이 구조적 은폐에서 시작된다. 지식이 축적되는 방식도, 그 지식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동기도 모두 개인에게 집중되어 있다.
기존의 Bus Factor는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버스에 치이면 프로젝트가 멈추는 사람의 수." 특정 역할을 한 명이 독점할 때의 리스크다. Agentic Workflow 시대에 이 개념은 두 차원으로 확장된다.
첫 번째는 다중 역할의 동시 공백이다. 기존에는 서비스기획자가 빠지면 서비스기획 역할이 비었다. 이제는 한 사람이 서비스기획이면서 데이터 분석이고 PoC 엔지니어다. 그 사람이 빠지면 세 개의 역할이 동시에 비어버린다.
두 번째가 더 본질적이다. AI 워크플로우의 암묵지는 원칙적으로 문서화가 불가능하다. 어떤 프롬프트가 어떤 맥락에서 효과적인지, 특정 모델이 어떤 방식으로 틀리는지, 파이프라인의 어느 지점에서 인간 판단이 개입해야 하는지 — 이것은 수천 시간의 반복 실험으로 쌓인 체화된 지식이다. 문서로 옮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그리고 그 경험을 쌓을 사람이 없다면, 지식은 그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삼성 반도체의 2023년 사례는 이 현상의 위험한 단면이다. 엔지니어들이 외부 AI 도구에 내부 소스코드와 회의 내용을 입력하면서, 핵심 지식이 조직의 공식 시스템이 아닌 개인과 외부 플랫폼 사이에만 존재하게 됐다. 보안 사고이자 지식 이전의 실패 사례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조심하면 해결되는" 개인의 실수가 아니다. 역할 자체가 해체되는 방식으로 조직이 재편되면서, 더 구조적인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
3. 역할은 어떻게 해체되는가
T자형 인재라는 개념이 있다. 하나의 깊은 전문성(수직)을 가지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협업할 수 있는 넓은 이해(수평)를 갖춘 사람. 1990년대 McKinsey에서 시작된 이 개념은 한동안 이상적인 인재상으로 통용됐다. T자형 구조는 그래도 역할을 유지했다. 수직 축이 여전히 단일 전문성을 지정했으니까.
AI 에이전트는 이 수직 축 자체를 흔든다.
Harvard Business School과 BCG의 2024년 필드 스터디(컨설턴트 244명)는 AI 사용 방식에 따라 세 가지 패턴을 발견했다. Cyborg — AI를 기존 역할의 보완으로 쓰는 사람. Centaur — 인간이 잘하는 부분과 AI가 잘하는 부분을 명확히 나눠 협업하는 사람. Self-Automator — 자신의 역할 일부를 AI에게 완전히 위임하는 사람.
이 패턴이 중요한 이유는, 동일한 직군 내에서도 패턴이 다르다는 점이다. 역할이 아니라 개인의 판단과 AI 활용 방식이 결과를 결정한다. "같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비슷한 방식으로 일한다"는 전제가 무너진다.
조직 단위에서도 같은 변화가 나타난다. LinkedIn의 APB(Accelerated Product Build) 프로그램은 PM, 디자이너, 엔지니어링을 하나의 팀이 처리하도록 재설계했다. 채용 방식도 이력서 기반에서 "60초 데모"로 바뀌었다. 역할이 아니라 결과물로 사람을 본다는 의미다. WEF의 2025년 보고서는 향후 5년간 전체 직무의 22%가 변환될 것으로 예측한다.
역할 경계가 허물어지면 인수인계의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기존 인수인계는 역할의 이전이었다. "이 역할을 맡게 됐으니, 이 업무를 배워라." 이제는 역할이 아니라 방법론의 이전이 필요하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배워라." 그리고 그 방법론을 전달하려면 명세가 필요하다.
여기서 문제가 완결된다. 방법론을 명세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방법론을 가진 사람뿐이다.
4. 개인이 조직 방향을 결정한다
이 구조가 이미 조직 설계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조직의 방향이 정해지면 개인이 그 안에 들어간다." 전통적 채용의 논리다. 이제 방향이 뒤집히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Shopify CEO Tobi Lütke는 직원들에게 메모를 보냈다. "AI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헤드카운트 요청이 가능하다." 새로운 역할을 정의하기 전에 AI 활용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라는 선언이다. 조직 구조가 개인의 AI 활용 역량을 전제로 설계된다.
Moderna는 CIO 자리를 없앴다. HR 수장이 HR과 IT를 통합한 CPDT Officer 역할을 맡고, 직원 5,800명과 3,000개의 커스텀 GPT가 함께 운용된다. 직책이 사라진 게 아니라, 구성원의 실제 역량에 맞춰 직책이 통합됐다. 조직 구조가 사람을 따라 재설계된 사례다.
Amazon의 Andy Jassy는 2024년 9월 전사 메모를 통해 IC(Individual Contributor) 대비 관리자 비율을 최소 15%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2025년 1분기에 달성했다. 관리 레이어의 축소는 개별 IC의 케파가 올라간다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조직이 개인의 확장된 역량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다.
Microsoft는 2025년 Work Trend Index에서 이런 조직을 "Frontier Firm"으로 명명했다. 조사 대상 9,037명 중 9%인 844명만이 해당됐다. 아직 9%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McKinsey가 "The Agentic Organization"에서 표현한 것처럼, org chart(역할 위계)가 task network(성과 교환 네트워크)로 재편되고 있다.
개인이 조직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에서는, 그 개인이 빠졌을 때 조직이 방향을 잃는다. 대체자 문제가 인사 리스크를 넘어서 전략 리스크가 된다. 그리고 이 전략 리스크를 관리하는 수단이 결국 명세다 — 개인의 역량과 방법론을 조직의 자산으로 변환하는 인터페이스.
5. 명세라는 인터페이스
여기서 이 글의 핵심 역설에 도달한다.
1인이 다역할을 처리할 때, 그 일을 다른 전문가에게 넘기려면 명세를 만들어야 한다. 서비스기획 명세, 분석 명세, 개발 명세. 각 전문가가 자기 역할 범위에서 인수인계를 받으면 됐던 기존과 달리, 이제는 역할 경계를 가로지르는 방법론 전체를 문서화해야 한다.
문제는 이 명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세 역할 모두를 이해하는 사람뿐이라는 점이다. 인수인계를 위한 명세를 만드는 것 자체가 대체자를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사람의 일이다.
Scott Logic은 2025년 12월 이것을 "명세 역량 위기(specification capability crisis)"로 정의했다. AI가 구현 병목을 제거하자, 병목이 상류인 명세와 요구사항 단계로 이동했다는 분석이다. 병목이 사라진 게 아니라 위치가 바뀌었다.
METR의 연구는 이 역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AI를 쓰는 개발자가 안 쓰는 개발자보다 19% 더 느리다는 결과. 왜인가? AI를 제대로 쓰는 것 — 즉 좋은 명세를 만드는 것 — 이 AI 없이 코딩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인지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AI 잘 쓰는 사람"과 "AI 쓰는 사람"은 다르다. 전자는 명세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능력은 쌓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조직들의 대응은 "완전한 이전" 대신 "구조화"로 수렴하고 있다. BBVA는 20,000개 이상의 커스텀 GPT를 만들어 개인 지식을 조직 자산으로 변환했다. Meta는 50개 이상의 전문 에이전트로 암묵지 자동 문서화를 시도하며 도구 호출을 40% 줄였다. CoE(Center of Excellence) 허브앤스포크 모델이 파워유저의 지식을 에이전트 템플릿으로 제도화하는 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핵심 세 가지는 자동화되지 않는다. 최초 명세 작성, 예외 케이스 판별, 결과 검증. 이 세 가지는 고숙련 인간의 영역으로 귀속된다. 자동화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자동화하면 조직이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판단의 책임을 기계에게 넘기는 순간, 오류의 진원지도 사라진다.
명세는 지식 이전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명세를 쓴 사람이다.
나가며
스텔스 창업에 관심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 출신"이라는 질문은 조직이 개인을 역할로 환원할 때 성립하는 질문이다. 출신이 역할을 예측하고, 역할이 기여를 결정한다는 논리. 하지만 개인의 방법론이 조직의 방향을 결정짓는 구조에서, 이 질문은 점점 덜 유효해진다.
Frontier Firm은 아직 9%다. 그러나 Shopify, Moderna, Amazon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개인의 AI 활용 역량을 전제로 조직을 설계하는 방식. 관리 레이어가 줄고, 역할 경계가 허물어지며, 구성원의 특성이 조직의 전략을 결정하는 형태.
인수인계 불가 문제는 이 구조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정확히는, 해결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버그가 아니라 이 구조의 특성이다. 명세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 핵심 자산이 되고, 그 명세를 통해 조직의 역량이 재생산되거나 사라지거나 한다.
이 특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설계하는 조직과, 모르는 채로 운영하는 조직 사이의 거리가 지금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만들었나"로 말해지는 사람이 그 거리를 만드는 쪽에 있다.
참고 자료
- Microsoft/LinkedIn, Work Trend Index 2024, Edelman Data & Intelligence, 31개국 31,000명, 2024.02–03
- Microsoft, Work Trend Index 2025: The Frontier Firm, 2025.04.23, n=9,037
- METR, Measuring the Impact of Early-2025 AI on Experienced Open-Source Developer Productivity, 2025.07
- DX Research, 400개사 AI 도입 종단 연구, 2024.11–2026.02
- Fortune/NBER, CEO AI 영향 조사, 6,000명, 2026.02
- Josh Bersin Company, The Rise of the Superworker, 2025.01
- Josh Bersin Company / Eightfold AI, Pacesetters in the Superworker Era, 2025.06
- Fastly, 개발자 AI 활용 실태 설문, 791명, 2025.07
- HBS/BCG, Cyborg-Centaur-Self-Automator 필드 스터디, 컨설턴트 244명, 2024
- WEF, Future of Jobs Report 2025
- McKinsey, The Agentic Organization: Contours of the Next Paradigm for the AI Era, 2025.09
- Scott Logic, Specification Capability Crisis 분석, 2025.12
- Klarna 공식 보도자료, 2024.03 / 재고용 보도, 2025
- Shopify, Tobi Lütke 전직원 메모 (TechCrunch 검증)
- Amazon, Andy Jassy IC 비율 확대 전사 메모, 2024.09